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
박제가
빙 둘러 있는 성 가운데에 백탑이 있다. 멀리서 삐죽 솟은 것을 보면 마치 설죽(雪竹)의 새순이 나온 듯하다. 여기가 바로 원각사(圓覺寺)의 옛터다. 지난 무자년(1768년)과 기축년(1769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미중(美仲)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백탑의 북쪽으로 찾아뵈었다.
선생께서는 내가 왔단 말을 들으시더니 옷을 걸치며 나와 맞이하시는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을 잡아 주셨다. 마침내 당신이 지은 글을 모두 꺼내 와 읽게 하셨다. 몸소 쌀을 씻어 차솥에 안치시고, 흰 주발에 밥을 담아 옥소반에 받쳐 내오셔서는 잔을 들어 나에게 축수해 주셨다. 나는 지나친 환대에 놀라고 기뻐하며 천고의 성대한 일로 여겨 글을 지어 화답하였다. 서로에게 경도되던 모습과 마을 알아주던 느낌이 대개 이와 같았다.
당시 형암 이덕무의 집이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낙서 이서구의 사랑은 그 서편에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상수의 서루였고, 거기서 다시 꺽어져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과 유득공이 사는 집이었다. 나는 한번 갔다 하면 돌아오는 것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연거푸 머물곤 했다. 시문이나 척독을 썼다 하면 권질을 이루었고, 술과 음식을 찾아다니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
장가가던 날 저녁, 장인어른의 좋은 말을 끌고 와서 안장을 벗기고 올라타, 하인 하나만 데리고 나왔다. 때마침 달빛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현궁 앞길을 따라 말을 채찍질해 서편으로 내달려, 쇠다리(鐵橋) 주막에 이르러 술을 마셨다. 북소리가 삼경을 알리기에 마침내 여러 벗의 집을 차례로 거쳐 백탑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당시에 호사가들은 이 일을 왕양명 선생이 철주관 도인을 방문했던 일에 비기곤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6, 7년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지내면서 가난과 질병이 날마다 찾아들어, 이따금 서로 만나 비록 모두 별 탈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는 해도, 풍류는 지난날만 못하고 낯빛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재야 비로소 벗과 노니는 데도 진실로 성쇠가 있어, 피차간에 각기 한때일뿐임을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은 벗을 목숨처럼 중히 여긴다. 그런 까닭에 왕어양 선생은 <빙수 육가숙과 우장 매경곤이 달밤에 모여서 돌아다니다가 내 집을 들렀기에> 작품을 남겼고, 자상 소장형의 문집 중에도 예전 이웃과의 운치 있던 일을 추억하며 만나고 헤어지는 정회를 부친 글이 있다. 매번 이 책을 살펴볼 때마다 시대는 달라도 마음은 같은 느낌이 있어 서로 오래도록 탄식하곤 했다.
벗 이희경이 박지원과 이덕무 등 여러 분과 나의 시문 및 척독 약간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나는 <백탑청연집>이라 제목을 붙이고 이와 같이 서문을 지어, 당시에 우리들의 노님이 성대하였음을 보인다. 덧붙여 내 평생의 일 한두 가지를 말한다.
*인용: 정민, 이승수, 박수밀 외 옮김 <정유각집(하)> pp.103-105
*삼선 평어(評語): 참으로 맑은 인연이다. 마치 조물주가 우연하게도 북학파 실학자를 백탑근처 한 군데 모아 놓은 듯하다가 세월이 흘러 또다시 흩어 버린 듯하니, 인간의 운명도 그러하고 나라의 운명도 그러하다. 몰려오는 기운을 막을 수 없고, 흩어져 가는 기운을 모을 수 없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사람다운 일을 하기에는 수십 년이 걸리듯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자라서 사과를 맺기 위해서 수년이 걸린 것도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북학파의 부국강병의 꿈은 1961년 한 사나이가 홀연히 나타나서 그 꿈을 이루었다.
*왕양명(1472~1592)이 17세의 나이에 결혼하던 날, 우연히 산책하다가 도관 철주궁(鐵柱宮)에 들러 도사와 만나 밤새도록 양생설(養生說)을 토론하느라 신방으로 돌아가지 않은 일이 그의 <연보> 17세 조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