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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

맹문깨천, 법고창신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맹문깨천, 법고창신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2022.11.10.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 해석에 가장 어려운 고비는 해석 방향이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옛글에 나와 있는 내용의 근거를 찾아 한없이 과거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옛글의 본디 생각을 감안하여 미래로 향할 것인가? 처음에는 한없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랬더니만 참고문헌이 논어, 맹자, 시경, 한서, 장자, 노자 등 과거 경전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호라, 대부분 책이 이 방향으로 집필되었다. 참고문헌에 경제와 과학 그리고 남녀 간 사랑이 고스란히 빠진 반쪽짜리 책이다. 원래 집필 의도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인데 법고창신의 정신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내부 토의를 거듭 거듭한 끝에 책의 틀을 바꾸자. 옛글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해석), 현시대 정신에 접목하고(삼선), 미래의 방향(평어)을 제시하자. 그리고 사유의 원천을 참고문헌에 깨알같이 기록하자. 그러면 후배들도 왜 이렇게 해석되었는지 생각의 틀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 '법고창신'의 글쓰기 틀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버전 1.0을 완성하고 난 때이다. 다시 글을 엎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가장 난해한 부분이 [삼선]이었다. 내 독서 노트에 기록된 500여 권의 책에서 천자문에 가장 적합한 문장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원의(原意)에 충실한 글을 찾기 시작했다. 또 처음과 같은 오류에 빠지기 시작했다.

천자문을 지을 당시 연도가 대략 서기 520여 년임을 감안하면 그 당시 지식에는 없었던 경제와 과학, 기술, 민주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남녀 간 사랑이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찾아 채워 넣지 하는 고민이다.

자, 어떤 산을 오른다. 최후의 산인 것처럼! 정상에 올라 보니 경치가 좋고 풍경도 매우 뛰어나다. 또 그 산을 오른다. 이제는 새로운 볼거리가 없을 정도로 인식이 밋밋해지기 시작한다. 그때 위를 쳐다보니 또 높은 산이 보인다. 다시 그 산을 오른다. 거기서 바라본 경치는 처음 올랐던 산에서 보았던 풍경과 매우 달랐다. 시야가 더 넓어져 멋있었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처음에 오른 산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한계인 것처럼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는 것처럼 느끼지만, 읽고 또 읽다 보면 어느새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면 갈아엎는다. 갈아엎고 또 갈아엎고, 그러기를 5번, 이제는 내 글이 내 글을 갈아먹는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 현상이 발생한다. 그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면 이제 멈추어서 퇴고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 [삼선]이 자리 잡자 [평어]가 문제였다. 짧은 글 두 줄로 전체를 압축하면서도 미래의 방향으로 내 쳐야 하는 경구를 만들어야 한다. 평문이 아니라 시어(詩語)가 되어야 한다. 논리 너머에 논리가 있는 시어는 공대생이 쓰기에는 언제나 벅차다.

동해 해파랑길 33번 코스를 수없이 걸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그래 <사기열전>의 소제목이 모두 의미가 깊은 시어가 아닌가? “모방이 창조다.” 옳거니 이제 방향이 잡히니 글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짧은 경구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현대 서적의 핵심 키워드에 많았다. 드디어 내 독서 노트에서 아껴두었던 명문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삼선]에 인용한 문장은 본문에 들어가 활자로 표시되지만, 내가 왜 이 문장을 선택하였는지는 독자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깨알 같은 주석을 달아 왜 이 책에서 이 문장을 선택하였는지 생각의 꼬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음복까지 제사여~” 그렇다. 참고문헌까지 책이다. 참고문헌이 없는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운 ‘주의(主義)’다. 내치는 힘은 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글에 오래 숙성된 생각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골풍경(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