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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

저 위대한 풀 그대가 바로 억새가 아닌가?

 

 

저 위대한 풀 그대가 바로 억새가 아닌가?

2022.11.8.

우리 안에는 사물의 고유 가치를 측정하는 기계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꼭 집어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비교를 해주어야 그제야 분별력이 생긴다. 가령, 가을철 어디를 가고 싶기는 한데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할 때, 그 흔한 TV에서 혹은 즐겨 찾는 페북에서 한 토막의 글이라도 읽게 되면 마음을 결정하게 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 이것이 삶의 핵심이다. 절대가치를 모르다 보니 상대가치로 남들과 비교하는 하수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 남에 의해 자신의 금을 긋게 되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 더하여, 웬만하면 그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세 가지 습성을 갖는다. 

첫 번째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의 깊은 애착이다. 매몰 비용 효과라고도 하는데,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한번 정들면 뒤꿈치가 까여도 신을 수밖에 없는 증후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너무나 흔하여 구태여 사례를 들 필요조차 없다. 

두 번째는 얻은 것보다 잃는 상실감에 몸서리치는 경향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력하여 두려움으로까지 발전한다. 손때 묻은 자전거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평생 그대로 끄달려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정’이나 ‘의리’로 포장하여 불편한 속마음을 감춘다. 

마지막은 제 눈에 안경이다. 모두 자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선호하는 지식으로 내가 경험한 바대로, 내가 느낀 감정과 추억을 바탕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남들도 그렇게 따라주기를 은근히 강요하기도 하고 때론 강압하기도 한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남들도 좋아하리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남들도 좋아하리라는 생각하는 것은 거의 당연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정치적 견해, 역사적 관점, 경제관도 마찬가지로 적용한다. 그래서 꼰대가 된다.

이덕무(李德懋)는 “일 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모춘(暮春) 10여 일에 불과하다”라고 했으며, 소동파(蘇東坡)는 “봄밤의 한 시각은 천금을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계절 중 봄은 화려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다.

일 년 중 가장 많은 꽃이 봄에 핀다. 살구꽃과 복숭아꽃, 라일락과 진달래, 아카시아와 장미 등 어디를 가도 아름답고 찬란한 계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된서리가 내려 숙살(肅殺, 추위가 와서 초목이 말라 죽는 것)이 되면 모두 쓰러지는 진풍경을 면하지 못한다.

늦가을 낙동강 섶 들판은 온통 억새 물결이다. 그 많던 미루나무가 사라지고, 그 고왔던 금 모래 빛 백사장도 사라지자, 그 자리에 억센 억새가 물결일 듯 밀고 들어왔다. 억새란 놈은 참으로 질긴 풀이다. 풀잎이 칼날 같아서 베이기 일쑤이고 웬만한 짐승도 뜯지 못하는 풀이다. 뿌리가 워낙 단단하게 덩이째 엉켜 있어 삽이나 괭이로는 어림도 없다.

참으로 고귀하지 않은가? 농부들이 마구 뿌려대는 제초제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논두렁에 떡 하니 자리 잡아 은빛 물결을 일렁이고, 강섶 금빛 백사장을 온통 점령하여 무성한 군락지를 이룬 저 위대한 풀, 저들이 바로 초망굴기(草莽崛起)의 억새가 아닌가?

*사진은 시골 억새 풍경(202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