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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

떨림에서 설렘으로, 다시 즐거움으로

 

 

떨림에서 설렘으로, 다시 즐거움으로

2022.12.15.

영원한 오빠, 가왕(歌王) 조용필. 70을 훌쩍 넘긴 그가 ‘찰라’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우리가 처음 마주친 순간 내게 들어온 떨림 그때는 뭔지 나는 몰랐어 햇살이 붉게 물드는 창 밖 저녁노을의 끝에 자꾸만 걸려 너의 얼굴이” 첫사랑의 상큼함이다.

사랑에는 나이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만큼 잘 산다는 징표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고 신체 나이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시대, 그러니 가왕이 그런 나이에 저런 노래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은 반긴다.

풍요의 시대, 여전히 신문 지상을 장식하고 있는 뉴스는 죄다 우울한 이야기와 불투명한 미래를 논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불확실성 심리를 자극하여 ‘반응’을 얻고자 한다. “내일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 단순한 진리를 2천 년 전에도 우려먹었는데. “오늘만이 절대다. 내일이 오늘이 되고, 어제의 내일이 오늘이다”라고 줄기차게 말씀하신 분이 석가이고 공자이며 예수가 아닌가?

조금만 사고(思考) 실험을 해보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 부족함보다는 풍족함이 가져다주는 낭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삶이 현대다. 안주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대못을 여러 개 박아 그것을 꽉 움켜 지기만 한다면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살아야 할 목적보다 누려야 할 목적이 더 큰 시대, 집 밖이 온통 위험투성이라고 아이들을 닦달한 결과, 집 안으로만 들어오려 하고, “집이 좋아요. 엄마 밥은 더 좋아요. 여친은 있어야 하지만 결혼은 싫어요.”라는 도전이 사라진 풍요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스스로 내적 결핍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궁핍을 조장하지 않는다면, 과연 내일로 점프하려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내일을 지배하지 않고는 어떻게 오늘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리오? 어쩌면 이런 세태가 한 세대 두 세대 더 흐른다면 인류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국민이 지배하는 민주주의가 오기는커녕 오히려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사회 혹은 그전에 존재했던 초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로 회귀할 것이다.

누가 하라고 말한 적도 없고, 하지 말라고 말한 적도 없고, 더구나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도 전혀 없는 북콘서트. 일단 저질러 놓았지만, 저지른 만큼 두려움도 컸다. 무엇을 다 예견하여 전체를 설계한 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아이디어를 모아 최적의 길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마치, 퇴계와 기대승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처럼, 처음과 끝이 변하지 않는 이는 기대승이요, 처음과 끝이 다른 이는 퇴계라, 나도 처음과 끝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떨림으로 바뀌고, 떨림이 설렘으로 이어지고, 다시 설렘이 즐거움으로 바뀌기까지는 한참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낯선 사람 앞에 선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 마디다. 첫마디가 순탄하게 이어지면, 그다음은 가벼운 떨림이 오고 즐거움이 찾아든다. 

글쎄. 내 첫마디를 무엇으로 할까? “쥐뿔~, 공대생이 인문학 콘서트를 한다고 놀고 있네. 근데 하면 왜 안 되지. 누가 아나. 세상이 바뀔지. 세상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 내가 바뀌면 되지 않나?” 혹여 한번 망가짐으로 더 많은 편안함을 얻지 않을까? 싶다.

*사진은 인사아트홀 출입문에 걸 대형 걸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