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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윤/역사학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언론사 책소개>

 

조선의 마지막 자주 개혁 기회를 앗아간 사나이

송고시간 | 2019-10-24 08:00

 

이양자 교수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출간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우리 민족의 명운을 가른 19세기 후반기에 악랄한 국권 침탈과 가혹한 경제 수탈로 조선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외세의 선봉이라고 하면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근대사 전문가인 이양자 동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외세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만든 결정적 인물로 청조 말기의 풍운아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를 꼽는다.

 

임오군란(1882년)에서 청일전쟁(1894년)에 이르는 10여년간 조선이 자주권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원세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규명한 이 교수의 신간은 제목에서는 '위안스카이'라는 인명을 쓰고 있지만, 정작 책의 본문에서는 같은 사람을 시종일관 '원세개'로 지칭한다.

 

이 같은 '이중 인명'은 그가 차지한 역사적 자리의 한 성격을 반영한다. 중국인의 이름은 중국 역사에서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는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전의 인물은 우리식 한자음으로, 그 이후는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신해혁명 이전인 1859년 태어나 그 이후인 1916년에 사망한 그는 '원세개'일 수도, '위안스카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이 안팎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추구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임오군란~청일전쟁의 시기에, 중국 역사상 손꼽을 만큼 교활하고 음흉하면서도 추진력과 정세 판단이 뛰어났던 간웅이 국권을 좌지우지했던 것이 조선 왕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불운인지도 모른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은 조선 정세에 개입하기로 하고 수사제독(水師提督) 오장경이 이끄는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원세개는 오장경의 막하로 조선땅에 들어왔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에 불과했으나 민비의 정적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연금하고 반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을 보호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조선은 물론 본국 청의 정치 무대에서도 뚜렷이 존재감을 부각했다.

 

문필에 재능이 없어 과거를 포기하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간 원세개였으나 무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리더십과 결단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진출한 청군 병졸들의 기율이 느슨해져 민가를 약탈하는 등 문제를 야기하자 원세개가 오장경에게 실태를 보고해 군율 확립의 권한을 위임받고서는 민가 출입이나 대열 이탈 등의 위반 행위를 저지른 병졸 여러 명을 참수하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군 간부들도 본국에 귀환시킴으로써 장졸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대원군과 고종, 민비, 일본과 청국의 군대 등 모두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임오군란 와중에 대원군을 제압하는 것만이 청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를 납치해 청국으로 압송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조선 군사들을 제압한 것도 원세개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원세개는 조선 신식 군대의 창설을 주도해 1883년 1월에는 2천여 병사의 총수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갑신정변에서는 더욱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파들이 거사해 중신들을 살해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자 원세개는 직속 상관인 오장경은 물론 청국의 실력자인 이홍장까지도 건너뛰어 독자적 판단으로 개화파와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삼일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1884년 11월 일시 귀국했다가 다음 해 8월 다시 조선으로 온 원세개는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로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監國大臣)' 역할을 하게 된다.

 

청과 조선은 명목상 종주국과 번국의 관계였지만 양국의 역사에서 청의 관리가 조선에 주재하며 온갖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총독 행세를 한 것은 원세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세개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조선 해관(海關·현대의 세관과 유사)을 중국 해관에 통합·종속시켰고 조선의 차관 문제도 낱낱이 간섭해 청국으로부터만 차관을 얻도록 했으며 전신·통신 분야의 시설도 청국이 선점 및 독점토록 하는 것과 함께 청국 선박에 조선의 연해와 주요 강에 대한 독점적 운항권을 부여하는 등 경제적 침탈에도 열을 올렸다.

 

원세개의 비호를 받은 청국 상인들은 버젓이 밀무역을 일삼았고 이를 단속하는 조선 관청을 습격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으로 조선 경제에서 청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일찍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가 됐다.

 

조선에서 조정 위에 군림한 원세개는 심지어 조선에 머무는 10여년 동안 세 명의 조선 여인을 취해 7남 8녀를 둘 정도로 군주에 못지않은 향락을 누렸고 이 같은 그의 '황금기'는 청일 전쟁에서 패해 청국으로 쫓겨간 1894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저자인 이양자 명예교수는 책의 맺음말에서 "임오군란~청일전쟁의 시기는 그야말로 날로 격화되는 세계적 제국주의 상황에서 조선에는 짧지만 자주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이 황금같은 시기가 원세개의 기막힌 간섭과 책동으로 유실되고 말았다"고 밝혔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9/10/24 08:00 송고

 

P. 20

 

속칭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린 원세개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감국대신’처럼 행세하면서 조선과 청국의 종속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음은 물론이고, 경제 면에서 청상의 보호와 통상 및 교역의 증대에도 공헌했다. 청 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조선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양국의 해관 통합, 조선에 대한 차관 전담, 조선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행했다. 이렇듯 원세개는 조선의 일을 청이 주관하게 만들고, 차관 문제에까지 간여함으로써 조선이 외세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했다.

 

P. 33

 

속칭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린 원세개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감국대신’처럼 행세하면서 조선과 청국의 종속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음은 물론이고, 경제 면에서 청상의 보호와 통상 및 교역의 증대에도 공헌했다. 청 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조선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양국의 해관 통합, 조선에 대한 차관 전담, 조선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행했다. 이렇듯 원세개는 조선의 일을 청이 주관하게 만들고, 차관 문제에까지 간여함으로써 조선이 외세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했다.

 

P. 62

 

속칭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린 원세개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감국대신’처럼 행세하면서 조선과 청국의 종속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음은 물론이고, 경제 면에서 청상의 보호와 통상 및 교역의 증대에도 공헌했다. 청 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조선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양국의 해관 통합, 조선에 대한 차관 전담, 조선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행했다. 이렇듯 원세개는 조선의 일을 청이 주관하게 만들고, 차관 문제에까지 간여함으로써 조선이 외세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했다.

 

P. 85

 

 

날조 전보로 조정 대신들을 위협한 것은 조선을 능멸하고 종주국으로서의 청의 위치를 강하게 부각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다. 주한 각국 공사들이 원세개를 일컬어 “오만한 기세로 거들먹거리면서 한정(韓廷)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의한 국왕 폐위 문제를 보더라도 그의 행동이 얼마나 방자하게 조선을 능멸하고 모욕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증명한다.

 

P. 132

 

이홍장은 청상의 용산 이전 문제에 대해 “청상들이 이에 따르지 않고, 날마다 의논했으나 화합하지 않으니 홀로 옮기라고 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조선 정부가 청상의 상잔(商棧) 이전료를 빨리 조달하는 것이 급선무다”라는 말로 이전료 조달을 독촉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좌절한 조선의 근대와 중국의 간섭

자주적 개혁의 마지막 기회를 앗아간 감국대신

 

위안스카이는 1882년부터 1894년까지 한중 관계사상 전례 없이 우리나라를 옥죄고 간섭한 청국의 관리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한 공적을 인정받아 1885년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감시하는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의 정책 지원을 받으며, 고종 정권의 외교적 자주화와 차관을 통한 자립적 내정 시도를 사사건건 봉쇄해 조선의 국권을 유린했다. 그는 조선의 수도 한성과 내지를 청 상인이 영업할 수 있게 개방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력히 집행하고, 청 상인의 조선 내지 밀무역까지 지원하는 등 파렴치한 침탈을 자행해 세계 제국주의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권 침탈의 선례를 만들었다. 그는 한반도 내에서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 청의 해관과 전신, 기선, 항운을 조선까지 연장해 독점하려 시도했으며, 고종 정권의 외교관 파견과 차관 도입 시도를 철저히 방해했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1882~1894년은 날로 높아지는 제국주의의 격랑 속에 조선이 자주적 개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 천금 같은 기회가 어떻게 유실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위안스카이가 울리는 역사의 경종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조선의 망국을 일본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며, 청나라가 중화제국의 부흥을 위해 조선을 침략한 역사는 알지 못한다. 위안스카이가 집행한 청국의 조선속국화 정책은 1905년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이전에 가장 강도 높은 외세 침략의 형태로 실시되었다. 중국의 시진핑이 방미 당시 트럼프를 만나 “한국은 우리 중국의 속국이었다”라고 귓속말을 했던 것은, 그때의 뼈아픈 역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고종과 민비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청나라를 불러들이는 주체성 없는 외교적 선택을 함으로써 망국의 길을 걸었다. 현재 아시아는 미국·일본 대 중국·러시아가 겨루는 신(新)냉전시대에 돌입했고, 한반도는 그 냉전 구도의 뇌관에 자리하는 운명을 맞고 있다. 지정학적 여건이나 국력으로 보아 신냉전 상황에서 한국에 매우 절실한 것은 세계정세를 면밀히 분석해 냉엄한 선택으로 개항기 조선과 이름뿐이던 대한제국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국가가 잘못된 데는 일개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고염무의 말을 인용해, 우리 국민 모두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지 전망하며 국제사회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고 냉철히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시감처럼 일어나는 역사의 반복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경고일 것이다. 우리는 19세기 ‘감국대신(監國大臣)’ 위안스카이가 21세기에 울리는 경종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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