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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별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음력 8월 초7일

 

잠시 말을 쉬게 하고 성안을 둘러보니 시장과 마을이 자못 번화한데, 집집마다 대문을 잠그고 문 밖에는 양각등(羊角燈)을 모두 달아 놓아 하늘의 별빛과 아래위로 서로 뒤섞여 어울린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라서 두루 구경할 수가 없었다.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는 즉시 만리장성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 군졸 수백명이 보이는데 아마도 점호를 하는 것 같다. 삼중의 관문을 나와 드디어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자를 써놓으려고 차고 있던 작을 칼을 꺼내어 벽돌 위의 이끼를 깎아 냈다. 필낭 속에서 붓과 벼루를 꺼내어 만리장성 아래에 펼쳐 놓았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벼룻물을 구할 곳이 없었다. 성안에서 술을 사서 마실 때 밤을 새울 거리로 삼으려고 몇 잔을 더 사서 말 안장에 매달아 둔 것이 있었는데, 도리없이 그걸 벼루에 모두 쏟아부었다.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아, 서늘한 이슬이 내리는 가운데에 붓을 적셔 큰 글자로 수십 자를 썼다.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며 겨울도 아닌 계절, 아침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며 저녁도 아닌 시각, 금신(金神)이 때를 만난 계절이요, 관문의 닭이 홰를 치려는 시각,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다시 작은 고개를 오르니 새벽의 꺼져 가는 달은 이미 스러져 내려 앉았고, 계곡의 흐르는 물은 더욱 가깝게 들리며, 여기저기 어지럽게 둘러선 산들이 수심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언덕의 모습은 모두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 같고, 산굽이 으슥한 곳에는 적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때마침 불어오는 쓸쓸한 긴 바람에 소스라쳐 머리카락이 스산하게 흐트러진다. 이때의 느낌을 적은 글이 「산장잡기(山莊雜記)」편에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라는 제목으로 따로 있다.

 

*인용: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1>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pp.520-522

 

 

한밤에 고북구를 빠져나가며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은 창평(昌平)을 경유하면 서북쪽으로 거용관(居庸關) 장성을 나가게 되고, 밀운(密雲)을 경유하면 동북쪽으로 고북구(古北口) 장성을 나가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을 따라서 동쪽의 산해관(山海關)까지 700리이고, 서쪽의 거용관까지 280이리다. 거용관에서 산해관 사이에 있는 만리장성 중 가장 험준한 요새로는 고북구 장성만 한 곳이 없다. 몽고가 중국에 출입할 때 이곳이 항상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에 여러 겹의 관문을 만들어서 그 험준한 요새를 제압하고 있다.

 

송나라 학자 나벽(羅壁)이 지은 지유(識遺)에 “연경(燕京) 북쪽 100리 밖에 거용관이 있고, 거용관 동쪽 200리 밖에 호북구(虎北口)가 있다”고 했으니, 호북구란 곧 고북구이다. 당나라 때에 처음으로 고북구라고 이름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장성 밖을 말할 때 구외(口外)라고 일컫는다. 구외는 모두 당나라 때 동북방 오랑캐 추장 해왕(奚王)의 군사 진영 본거지가 되었다. 『금사(金史)』를 살펴보면, 금나라 말로 유알령(留斡嶺)이라고 부른 곳이 바로 고북구이다.

 

대개 만리장성 밖에 구(口)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곳이 100군데 정도 된다. 산을 따라서 성을 쌓았는데, 그 절벽의 계곡과 깊은 골짜기는 짐승이 아가리를 벌린 듯 깊이 함정이 파였고, 물이 들이쳐서 구멍이 뚫려 성을 쌓을 수 없는 곳에는 보루를 설치하였다. 명나라 홍무(洪武(1368~1398년) 때에 수어천호소(守禦千戶所)를 두어 관문을 다섯 겹으로 만들었다.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끼고 돌아가서, 배로 광형하(廣硎河, 백하)를 건너 한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갔다. 밤이 이미 삼경을 지난 시간에 겹겹의 관문을 빠져나갔다. 장성 아래에 말을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가히 10여 길은 됨직했다. 붓과 벼루를 꺼내고 술을 부어 먹을 갈아서 장성을 어루만지며 글자를 썼다.

 

‘건륭 45년(1780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여기를 지나가다.’ 그리고 한바탕 웃으며, “나는 서생의 몸으로, 그것도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한번 장성 밖을 나가 보는 구나.” 라고 했다.

 

옛날 진시황 때 몽염(蒙恬)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장성을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까지 연결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판 만여 리 가운데 땅의 지맥을 끊은 곳도 없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지금 고북구 장성을 보니 과연 산을 파내고 계곡을 메웠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다.

 

하아! 여기 고북구는 옛날부터 수없이 전쟁을 치른 격전의 장소였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연왕(燕王) 유수광(劉守光)을 사로잡을 때 별장 유광준(劉光濬)이 이곳 고북구에서 승리를 했다. 거란의 태종이 산남(山南) 지방을 점령할 때 먼저 이곳 고북구를 함락시켰다. 여진이 요나라를 멸망시킬 때 장수 희윤(希尹)이 요나라 병사를 크게 격파한 곳이 바로 이곳 고북구였고, 그들이 연경을 점령할 때 장수 포현(蒲莧)이 송나라 병사를 패배시킨 곳도 바로 여기 고북구였다.

 

원나라 문종이 즉위하자, 장수 당기세(唐基勢)가 여기 고북구에 병사를 주둔시켰고, 여진 장수 살돈(撒敦)이 상도의 병사를 추격한 곳도 여기 고북구였으며,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가 북경으로 쳐들어오자 원나라 태자는 여기 고북구 관문으로 도망하여 흥송(興松)으로 갔다. 명나라 가정 때 북쪽 오랑캐 엄답(俺答)이 북경을 침범할 때 모두 여기 고북구 관문으로 드나들었다.

 

고북구 장성 아래는 바로 날고뛰고 전쟁과 정벌을 하던 전쟁터였으나, 지금 사해는 전쟁을 하지는 않지만 여기 사방의 산 주위를 둘러보면 수많은 골짜기는 오히려 음산하며 매우 어두침침하다.

 

때마침 달은 상현달로 고갯마루에 걸려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고 모진 모습이 마치 숫돌에 벼린 칼처럼 생겼다. 조금 뒤에 달은 더욱 고개 아래로 내려갔으나, 그래도 양쪽에 뾰족한 모습을 드러내더니, 홀연히 붉은색으로 변하여 마치 두 개의 횃불이 산에서 나오는 것 같다.

 

북두칠성은 반쯤 관문 가운데에 꽂혔으며, 사방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일고, 휙 하며 긴 바람이 숙연하게 불어와 숲과 골짜기가 모두 울린다. 짐승처럼 생긴 바위와 귀신 모양의 낭떠러지는 마치 전쟁터에 병장기를 모조리 세워 둔 것 같다. 강물이 양쪽의 산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며 부딪치고 싸우는 모습이 건장한 말들이 내닫고, 징 소리 북소리가 마구 울리는 것 같다. 하늘 끝에 학의 울음소리가 대여섯 번 나는데, 그 소리가 맑고 아련한 것이 마치 길에 간드러지는 피리 소리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이 이는 천아(天鵝)의 소리라고 말한다.

 

후지(後識)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생로병사 하는 동안에 나라의 강토를 벗어나지 않는다. 근세의 선배로는 오직 노가재 김창업과 나의 벗 담헌 홍대용이 중원의 한 모퉁이를 밟아 보았다.

 

전국시대의 일곱 나라 중에 연나라는 그중의 하나였고, 서경 우공(禹貢)편에 나오는 구주(九州) 중에 기(冀, 하북성)는 그중의 하나였으니, 천하의 땅덩어리를 가지고 본다면 연경과 하북 지방은 그야말로 한 모퉁이의 땅에 지나지 않을 것이로되, 원나라 명나라에서 지금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천하를 통일한 천자는 이곳 북경을 도읍지로 삼아서 마치 옛날 장안이나 낙양처럼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소자유(蘇子由)는 중국의 선비인데도 오히려 자기 시대의 수도인 개봉에 이르러 궁궐의 장대함과 국가의 창고와 곳간, 성곽과 연못, 정원과 동산의 풍부하고 대단함을 우러러 본 뒤에 천하의 크고 화려한 것을 알게 된 것을 스스로 행운으로 여겼으니,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비가 그 거대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한번 볼 수 있다면 스스로 행운으로 여기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내가 이번 여행에서 노가재나 담헌보다 더더욱 스스로 행운으로 여기는 점은 장성 밖을 나가서 장성의 북쪽인 막북(漠北)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니, 이는 선배들에게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에 여정을 좇아서 가니 마치 장님이 꿈속을 가는 것 같아서, 산천의 빼어난 경관과 요새와 관문의 웅장하고 기이한 모습을 정말 두루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바로 상현달이 관문 안을 비껴서 비추고, 양쪽 절벽은 깍아지르듯 100길 낭떠러지로 벽처럼 서 있으며, 길은 그 사이로 나 있다. 골짜기는 길어서 상자 같고, 지름길은 깊어서 우물 같았다. 진 나라의 함곡관 , 조나라의 정경(井徑)의 관문과 입구가 응당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담이 작고 겁이 많은 성격인지라, 더러 대낮에 빈방에 들어가거나 밤중에 희미한 등불을 마주치기라고 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가슴이 두근두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귀신이 쫓아오는데 소리를 질러도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달려도 다리에 힘이 빠져서 물러지는 것 같다.

 

지금 내 나이 마흔넷이건만,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직도 어릴 때와 마찬가지이다. 오늘 한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아래에 서고 보니, 달은 떨어져 캄캄하고 냇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바람은 오싹하게 불며 반딧불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니, 보고 듣는 모든 상황이 겁이 나고 휘둥그레지며 기이하고 야릇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홀연히 두려운 생각이 사라지고 특이한 흥취가 도도하게 솟아나며, 헛것으로 보여 사람을 놀라게 했던 숲과 바위에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으며 동요되지 않으니, 이것이 더더욱 행운으로 여길 점이다.

 

한스럽게 여길 것은 벼루는 작고 붓은 가늘며, 돌에는 이끼가 끼고 먹물은 말라서 큰 글자로 이름을 쓸 수 없고, 또 시를 남겨서 만리장성의 고사를 만들지 못한 점이다. 이른바 크게 쓴다는 것은 특별히 크게 말하는 것일 터이다. 이런 기문을 지음에 오고 가는 7천여 리 사이에 하루도 좋은 구절과 글자를 다듬으려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 한편을 겨우 시도하려고 하자 문장의 성취가 이처럼 쇠잔하고 나약하여 보잘것없게 되었다.

 

이제 이 기문을 읽어 보니 한밤에 웅장한 관문을 빠져나가는 기개가 전혀 없다. 이제야 글 짓는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알겠도다. 이에 아울러 기록하여 당시 마주친 기인한 경치와 글 짓는 어려움을 표시해 둔다.

 

*인용: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2>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p.494-500

 

*평어(評語): 한 편의 글 안에 그 모든 것이 온전히 들어 있는 글,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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