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비상사태를 선포하라
2022.10.31.
어느 시골 농부가 있었다. 늘 정성스럽게 소죽을 끓여 먹였는데, 하루는 암소가 가슴을 들이받아 큰 상처가 났다. 그러자 할머니한테 “저놈의 소를 당장 팔아 버리게” 하면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응급실에서 찢어진 폐를 수술하려고 검사를 해보니 폐암이 초기였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저놈의 암소를 팔지 말게나, 복덩이일세” 한다.
어제 이태원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전에 약속된 ‘일삼오’의 북한산 등반을 포기할 수 없어 애도의 마음을 간직한 채 노적봉으로 오른다.
대서문을 지나 너른 공터에서 웅삼(熊三)님이 갖고 온 한과와 커피를 마시는데, 먼저 온 일행이 한과를 좀 달라고 한다. 한과를 건네주니 자신들은 노적봉 암벽을 오른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암벽 등반용 로프를 어깨에 칭칭 둘러메고 있는데 연세가 75세 남성, 65세 남성, 62세 여성분이었다.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하면서 노적사 단풍 터널을 지나 노적봉 리지 등반 바로 아래 장소에 까지 가서 옆 능선으로 탈출하여 노적봉 아지트, 일명 ‘삼은통천(三恩通天)’을 향했다.
삼은통천이란 ‘부모와 스승 그리고 나라’의 은혜 3가지 혹은 ‘산과 우정 그리고 건강’의 3가지 은혜가 하늘에 맞닿아 통하리라는 뜻이다. 그곳은 백운대와 만경대의 늘씬한 암릉이 훤히 드러나는 곳으로 통천문(通天門)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세 명이 족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옆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늘 거기에서 싸 온 음식을 곁들이면서 천하의 시비를 논하기도 하고, 자신의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어제의 압권은 “전기밥솥에 코드를 뽑아라.”와 “인생 3.0 true color의 도반을 찾아라.”였다.
어느 인왕산 아래에 한 부인이 살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대 전반, 그만 주부 갱년기에 들어서자 집 안에 있는 전기밥통의 코드를 아예 뽑아 버렸다. 밥통에 불이 꺼진 지 3년째, 집 안에 있는 3명의 남성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밥때가 되면 땟거리를 찾아 인왕시장과 주변 홍제천을 샅샅이 뒤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집안은 무슨 귀신에 씌었는지, 자식은 서울시 공무원이 되고 부군은 석박사에 책을 두 권이나 집필했다.
오호라, 전기밥솥 코드를 3년째 뽑아 버리는 희대의 사건과 3명의 남정네가 이룬 성과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을까?
나는 두 개의 책임감 중 두 사람 중 하나가 반드시 행한 것이 원인이라 생각한다. 어느 부모라도 그러하듯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임무가 있다면 responsibility와 liability이다. 둘 다 책임감으로 번역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책임감(responsibility)은 24시간 가정을 관제하면서 자식의 궁핍이 무엇인지를 염려하여 개입과 비개입의 현명한 선택을 하는 일이다. 책임감(liability)은 가정 수입이 한계비용 0가 될 때까지 밀어주는 진정성이다. 절대적 액수가 아니라 상대적 액수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매월 은행 잔고가 0에 근접할 때까지 자식에게 투자할 때 그때 아무리 못난 자식도 부모의 진정성을 느끼고 변한다. 물론 상대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순위와 적절한 시기를 선택하는 전략적 사고가 필수다.
인천 부평구 계양산(桂陽山) 아래 모든 곰의 종사(宗師) 한 분이 살고 계셨는데, 그분은 대자유의 가치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겨 그렇게 실천하고 계신다. 퇴직하고도 10년 동안 취직하여 알뜰하게 가정경제에 보탬을 주었고, 이제는 3.0 true color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도반(道伴)을 찾고 있다.
살아생전 소망했던 것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고유한 빛깔을 찾아 순례길을 떠날 때 같이 갈 도반이 누구인가? 그것이 평생 같이 살았던 사랑하는 아내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신체적 변화에 차이가 뚜렷해지고,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뚜렷해지는 나이에 상대를 존중하는 것도 하나의 배려이다. 하지만 순례길에는 도반이 필요하다. 때로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우애도 깊지만, 때로는 살부살조(殺父殺祖) 할 만큼 냉엄해야 한다.
도반은 누구인가? 언제라도 흐르는 냇가에 물든 단풍을 보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막걸리 한잔에 짙은 인생의 외로움을 다 털어 넣어야 하고, 파르르 떨리는 그리움에 문득 눈시울을 적셔 그분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내면의 비상사태가 아니라 외면의 비상사태다.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지 마라. 어쩌면 그것이 진실의 소리이다. 여태 위선 가득하고 솔직하지 못한 행위에 반란을 일으키는 내면의 소리를 가득 담아 타인을 향해 선포하라. 이제 3.0 true color 시대가 되었다고, 지나온 관성만으로 살기 싫다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라.
늘 산행이 아쉽고 짧은 일삼오, 하산을 완료한 후 CU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짙은 가을의 향수를 달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사진은 동해어달해변 (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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