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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

잊지 못할 여행을 꿈꾼다면 고달사지로 떠나라

 

 

잊지 못할 여행을 꿈꾼다면 고달사지로 떠나라

2022.10.29.

2022년 10월 마지막 주다. 시간의 비가역성으로 세월의 엄중함이 절로 느낌으로 다가오는 때에 어디 잊지 못할 (memorable) 혹은 죽여 주는 (so cool) 여행을 꿈꾼다면 국보 제4호가 있는 여주 고달사지로 떠나라.

대부분 여행은 두 가지 목적으로 떠난다. ‘기억될만한 그 무엇을 축적’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소로 떠나거나, ‘기억된 것에 의한 선택’으로 이미 경험한 것을 더욱 돋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떠난다. 과거의 여행이 아름다웠다면 다시 찾아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행의 고수는 뻔한 이야기가 즐비한 남들이 다 가는 화려한 장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은 강가 돌멩이 하나에 혹은 쓰러진 폐사지 터에 놓인 탑 하나를 두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여행은 비움과 동시에 채워 넣음이기 때문이다.

봄내 쌓였던 나뭇잎이 짙은 낙엽이 되어 온갖 빛깔을 토해낼 때 울컥 그 무엇이 마음속 밑바닥으로부터 밀려온다면 그대는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여행이 아니라 죽여주는 잊지 못할 새로운 여행지를 선택해야 한다. 상상이 필요한 그곳, 홀로 덩그러니 빈터만 널려 있는 곳, 그곳에서 나만의 그 무엇으로 꽉꽉 채워 넣는다면, 가을날 허전함이 허전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시인의 「폐사지처럼 산다」라는 시다. 그는 왜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고, 부서진 석등에 불을 켜고, 또다시 입도 혀도 몸도 영원히 어두운 심연 속에 봉인되기를 원했는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고, 누구에게나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그것을 쓰러진 석탑에게 말하고, 그것을 반쯤 묻힌 거북에게 맹세하고 다시 봉인하리라.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여주 고달사지는 찾아 들어가는 길이 중요하다. 찾아가는 길이 중요한 것은 기억의 잔상(殘像) 때문이다. 묵묵히 두어 오랫동안 숙성시킬 기억이 있는가 하면, 단번에 단칼에 끊어버릴 기억이 있다. 여주 고달사지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기억을 환기시키기 좋은 장소다. 남한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천수답이 나오고 띄엄띄엄 집들이 나온다. 강이 만들어 주는 구불구불한 생각이 조각모음처럼 이어질 때, 커다란 빈터에 콧구멍이 커다랗고 시커먼 무시무시한 거북이 등에 올라탄 화려한 비석을 보게 된다.

나는 비석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오직 시커먼 거북이, 천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면서 온갖 풍상을 귓등으로 들었을 거북이 이놈, 손가락을 거북이 콧구멍 속에 푹 찔러 넣은 채 가만히 숨결을 듣는다. 아무 숨결이 없다. 소원을 빌어본다. 아무 대답이 없다. 오호라, 이놈이 천 년 동안 버틴 이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이놈들아, 네가 이미 네 답을 들고 왔는데 무슨 말을 덧붙이리오” 말은 거북이한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서늘한 목소리가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콧구멍이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거북이의 앞모습과 다르게 발톱은 앙증맞고 꽁지는 왜 그렇게 귀여운지? 병 주고 약 주는 거북이를 뒤로 하고 국보 제4호가 있는 숲속을 오른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화강암의 화려한 자태, 분명 시골 촌뜨기도 아니지만, 세련미가 가득 넘치는 뽀얀 도회지 국문학과 여대생도 아니다. 풍성하다. 짙다. 화려하다. 그러면서도 요란스럽지 않다. 

이미 끌탕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마흔 후반의 풍만한 몸짓이 가져다주는 여인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삶이 아닌가? 바람에 꽃잎이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 더구나 뿌리째 뽑히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사랑할 줄 알고 멋을 알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한다.

파란 하늘에 불에 탄 늙은 고목이 초현실주의와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싹둑 잘려 나간 가지에 몸뚱이만 덩그러니 남아 너른 폐사지를 훔쳐보고 있다. 고려 광종, 국운이 한창 뻗어나갈 때 수 천 칸이나 되었던 절간이 이제 달랑 거북이 몇 마리만 남아 내게 말을 걸지만, 푸른 하늘만큼이나 텅 비워 버린 내 마음조차 거북이게 들킨 하루였다.

*참고 및 인용: 대니얼 카너면 이진원 옮김 <생각에 관한 생각> p.475,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편> pp.341-342

*사진은 여주 고달사지 (202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