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마지막 잎새보다 더 붙들고 싶은 이방인
2022.11.22.
우리가 ‘아름답다’ 혹은 ‘맛있다’ 하고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태어나서 최초로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최초로 그 맛을 알았을 때, 그러고 나서 그 이후에 가장 근접한 ‘아름다움’과 ‘맛’을 느낄 때 그런 반응을 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인식도 똑같다.
내게 있어 이방인(異邦人)은 대학 시절 뜻도 모르고 마구마구 읽었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이방인>을 벗어날 수 없다. 최초의 개념이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고의 영역에서 강렬한 첫 느낌은 그만큼 무섭다.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살인했다고 황당한 말을 한다. 내게 있어 이방인은 카뮈와 실존철학 그리고 태양이 어우러진 기묘한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가 이국적 환상과 낯선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시절이 너무 젊어서이다.
송정림 작가는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 그럴 때면 거리의 한 모퉁이를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렇게, 낯선 이방인이 되고 내 삶의 제3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는 것. 습관처럼 걸어가고 있는 길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내 삶의 방향을 물어보는 일.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을 방문하는 일만이 내 안의 이방인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이라고 허무주의자 뫼르소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해준다.”라고 이방인을 반추한다.
내게 있어 이방인은 낯섦을 충동케 하고 그곳으로 향하는 이방인이다. 이것은 분명 젊은 시절의 닻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징조다. 배는 닻을 내려야 머물 수 있듯이, 내 닻은 처음 깊게 읽었던 ‘이방인’의 인상에 지배를 당하고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거위는 태어날 때 처음 본 동물이 어미가 되어 졸졸 따라다닌 것처럼 나도 카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 이방인에 변화가 생겼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원시 부족사회는 '친구, 적, 이방인' 단 3가지로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놀랄 만큼 단순한 인식 때문이다.
“'친구'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나 마을의 구성원이고, 자신의 무리와 현재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이웃 무리와 이웃 마을의 구성원도 친구다. '적'은 자신의 무리와 현재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웃 무리와 이웃 마을의 구성원이다. '이방인'은 멀리 떨어져서 자신이 속한 무리와 거의 접촉이 없는 무리에 속하는 미지의 사람을 말한다.”
오호라, 이제까지 허무주의에 빠진 뫼르소의 이방인에서 파푸아 뉴기니 원시 부족의 이방인 자리를 잡자, 아직 산업화 물결이 고향을 뒤흔들기 전에 우리 마을 모습과 같은 삶으로 되돌아왔다.
누군가 낯선 사람이 소정공파(昭靖公派) 파평 윤씨 집성촌에 들어오면 집안 어른은 우리와 관계를 찾기 위해 사돈 팔촌에 먼 족보까지 들먹이며 추적하곤 했다. 누구의 질녀가 그 동네로 시집가서 누구를 낳았고 그 아랫대가 누구와 결혼하고 그 사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데, 혹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확인이 되고 나서야 막걸리를 한잔했던 어른들의 아스라한 그 추억이다. 이렇게 태어나서 사방 백 리 이내에 삶을 살았던 우리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낯선 '이방인'은 경계의 대상이었고 확인의 존재였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이방인’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 것은 폴 서루 때문이다. 이제 이방인은 내면의 이방인도 아니요, 낯선 사람의 이방인도 아니요, 주류 세계를 만들어 세상을 지배한 백인이다.
그들은 산업화하지 않은 민족을 찾아 낯선 대륙 곳곳을 누볐고 구석구석 보물 찾듯 인생의 성공을 가름하는 잣대로 전리품 목록에 이를 추가하는 자랑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파푸아 뉴기니, 아프리카, 하와이, 아메리카에서 우수한 문명을 자랑하고 모범을 보이느라 여념이 없을 때 만들어진 이방인이다. 동아시아 문명화된 국가에서조차 이방인은 두려운 존재였으며 그 트라우마는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폴 서루에게 이방인과 마주침은 “광기의 한 형태를 경험하는 것과 유사하며, 친근했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질 때,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들이 드러나는 것”으로 느꼈다.
조선은 나라의 문을 열어달라고 권력자 아비의 묘를 파헤친 수모를 당했고, 일본은 에도만에 흑해선이 들어와 대포를 쏜 후 대문을 활짝 열었으며, 중국은 아편을 팔아주지 않는다고 생트집을 부리면서 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대포를 쏘아댄 결과 어쩔 수 없이 빗장을 풀었기에 이방인에 대한 추억은 달갑지 않다.
이제 그런 카뮈의 <이방인>을 어제 다 읽었다. 돌고 돌아온 이방인, 과연 나는 우리 사회의 제도 안에 존재하는 ‘친구’였나, 아니면 영원한 주변인이 되어 날 선 비판만 하는 찌그러진 모습일까? 그것도 아니면 늘 어정쩡한 스탠스에 이곳에도 끼이지 못하고 저곳에서 끼이지 못하는 허무한 이방인이 되어 늦가을만큼이나 허무의 냄새를 짙게 풍기면서 고독한 칼날을 들이대기도 하고,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만큼이나 황당한 논리로 세상 온갖 일을 재단하였던가?
뫼르소의 태양만큼이나 황당한 논리가 황당하게만 들리지 않은 그 견처(見處)의 틈새를 파고들어 ‘낄낄’대기도 하고, ‘껄껄’거리면서 늘 실체가 없는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오늘은 여기에서 기웃거리고 내일은 저기에서 기웃거리는 사내로 전락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이방인은 설렘이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면 이방인 된 듯한 그 떨림은 여전하다. 낯선 곳에 온전히 하루를 맡길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을 찾아 새로운 이방인이 되는 일, 어쩌면 그것은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그 감정으로 되돌아가고픈 충동일지도 모른다.
*참고 및 인용: 송정림 지음 <명작에게 길을 묻다> pp.302-309, 알베르 카뮈 <이방인> p.125,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어제까지의 세계> pp.75-76,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여행자의 책> pp.228-230
*사진은 시골 풍경(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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