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절차가 복잡하여야 생각도 확 바뀌는 법
2022.11.22.
“자동(紫峒)에 들르니 아름다웠고, 세검정(洗劍亭)에 오르니 아름다웠고, 승가사(僧伽寺) 문루(門樓)에 오르니 아름다웠고, 문수사(文殊寺) 문에 오르니 아름다웠고, 대성문(大成門) 위에서 조망하니 아름다웠고, 중흥동(重興洞) 어귀를 들어가니 아름다웠고, 용암봉(龍岩峰)에 오르니 아름다웠고, 백운대(白雲臺) 아래 기슭을 굽어보니 아름다웠고, 상운산(祥雲山) 동구가 아름다웠고, 염폭이 매우 아름다웠고, 대서문(大西門)이 아름다웠고, 서수구(西水口)도 아름다웠고, 칠유암(七游岩)은 극히 아름다웠고, 백운동(白雲峒)과 청하동(靑霞峒)의 입구도 아름다웠고, 산영루(山暎樓)가 매우 아름다웠고, 손가장(山暎樓)도 아름다웠고, 정릉 동구도 아름다웠다. 동대문 밖 모래톱에서 말들이 떼 지어 달리는 것을 보니 아름다웠다.”
핑계, 술꾼에게는 모든 것이 술을 마셔야 하는 핑곗거리고, 여행가에겐 모든 것이 떠나야 할 핑곗거리다. 술은 마셔야 하는 이유도 수도 없이 많지만, 떠나야 할 이유도 수도 없이 많다.
2022년, 내가 제주도로 떠나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책을 두 권(부자는 사회주의를 꿈꾼다. 맹꽁이도 문득 깨달은 천자문)이나 집필했고, 드디어 퇴직 준비로 회사에 나가지 않고, 결혼 30주년인데다가 육십갑자를 맞이했고, 아들놈 둘이 떡하니 자리 잡아 서울로 불러들였고, 어머님 구순 잔치를 해드려 집안 형제, 조카들이 다 모이는 호사를 누렸고…, 이것이 이유라면 그대는 진정 고수가 아니다.
여행이란 그런 외적 절차적 핑계에 있지 않다. 여행이란 그냥 훌쩍 떠나는 것이다. 그래야만 된다고 이유를 찾는 것은 그저 남들한테 핑곗거리를 던져 주려는 값싼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김녕 해변의 검은색 바위도 아름다웠고, 해변에 핀 늦은 구절초도 아름다웠고, 육각형 검은 주상절리 절벽도 아름다웠고, 검은 흙으로 짓이겨 빚은 듯한 바위도 아름다웠고, 천년 비자림 어두운 숲도 아름다웠고, 늦가을 단풍이 가득한 나무도 아름다웠고, 아쌀한 비자림 숲 향기도 아름다웠고, 다랑쉬오름을 바라보는 무밭도 아름다웠고, 밭 사이를 한없이 이어지는 돌담도 아름다웠고, 사람이 기대면 무너질듯하지만,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은 마을 돌담길도 아름다웠고, 삼나무숲 길의 전봇대와 같은 나무도 아름다웠고, 민오름의 말발굽도 아름다웠고, 민오름 억새도 아름다웠고, 쌍둥이 횟집 음식도 아름다웠고, 노점에 파는 황금향 귤도 아름다웠고, 제주 밤바다도 아름다웠고, 밤바다를 수놓은 가로등처럼 불을 밝히는 어선도 아름다웠다.
요컨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여행이다. 모름지기 그래야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것이 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2부로 이어짐)
*사진은 제주도 풍경(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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