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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비가 꽃잎을 씻으니 무지개가 달을 꿴다.

 

비가 꽃잎을 씻으니 무지개가 달을 꿴다.

2022.11.23.

“둘, 부슬비나 짙은 안개, 사나운 바람도 가리지 않는다. 일 년 중 봄놀이에서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바람 부는 날을 빼면 놀기에 좋은 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빗속에서 노는 것을 꽃 씻는 일이라 하고, 안개가 자욱할 때 노는 것을 꽃을 촉촉이 적시는 일이라 하며, 바람 불 때 노는 것을 꽃을 보호하는 일이라 이름 붙인다. 옷과 신발이 젖을까 아까워하며 신병을 핑계 대고 미루면서 미적미적 가려 하지 않는 자는 아래와 같이 벌을 한다.”

남고춘약(南皐春約), 서어(西漁) 권상신(權常愼, 1759~1825년)의 ‘봄나들이 규약’이다. 여행을 떠난 자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규약이 아닌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날이 흐리면 날이 흐려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왜냐고, 그런 날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순간을 어기적어기적 미루었다가는 평생 방안퉁수가 되어 집 밖을 벗을 날 수 없다.

제주 하늘이 잔뜩 흐리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떠나는 이의 급한 마음에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달랑 몸만 빠져나와 송악산 마라도 여객선 터미널로 향한다. 제주에서 모슬포로 가려면 한라산 우측면으로 따라가고, 제주에서 서귀포를 가려면 한라산 좌측면을 따라간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강을 건널 수 없고, 토목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라산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안다. 제주의 억새는 바람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을 바람이 없다면 억새도 없다. 송악산 들머리 바람의 언덕에 있는 억새는 모두 언덕에 기대어 누워있지만, 송악산 가는 길 해안 절벽의 억새는 모두 바다를 향해 누워있다.

거센 파도를 헤치고 길쭉한 호떡같이 생긴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배가 접안 하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해안 절벽에서 완전히 벗어나 뭍으로 올라오니 오징어 굽는 할아버지가 불난 집에 호떡 팔 듯 오징어는 굽지 않고 비옷을 판다. 모자라도 쓰고 왔으면 이 정도 비에는 끄떡도 없을 텐데, 이른 새벽 오두봉 여명을 놓친 것이 후회되어 서둘러 숙소를 나섰던 것이 한번 잘못된 선택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마라도에 짬뽕을 먹으러 온 것인가? 마라도 온 김에 짬뽕을 먹는가? 나는 분명 마라도에 왔고 짬뽕을 먹었다. 여당이라면 마라도 방문길에 점심으로 짬뽕을 먹었다 할 것이고, 야당은 분명 그 머나먼 길 국토 최남단 마라도까지 비행기 타고 자동차 타고 배 타고 짬뽕 먹으러 갔다 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짬뽕을 먹었다.

마라도 남쪽 절벽 위로 난 억새, 그 사이로 둘레길이 오롯이 나 있다. 그냥 스멀스멀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나는 분명 억새의 언덕이며 억새의 길이며 ‘서편제’ 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돌이 소리꾼 유화가 동호와 송화를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길처럼 비장하다. 차라리 하늘이 맑았다면 그것이 연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먹구름이 장차 무슨 일을 낼 듯 내리누르고 거기에 더하여 바람이 쉼 없이 억새를 일렁인다. 장면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법, 이 장면에 각인이 되면 언제라도 이 장면에서 이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여행이 주는 매력이다.

어찌, 대정을 지나고서 추사관을 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한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땅 붓으로 만들어 추사체를 완성한 인간이 아닌가? 세한도를 그린 공간, 제주도로 유배 온 지 8년 3개월 만에 아내도 죽고 친구도 떠나고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리안치의 형벌 속에 글자체를 다듬는 일, 득도를 한 셈이다. 

그의 제자 강위(姜瑋)는 유배된 추사의 모습을 “달팽이 집(蝸廬, 와려)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틀었다”라고 묘사했고, 연암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무지개 같은 광채를 발산하여 달을 찔렀다”라고 극찬하였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여정 ‘박수기정’의 탐방이 남았다. 박수기정, 중국 사자성어 같은 이 말은 ‘박수’라는 샘물과 ‘기정’이라는 절벽이 만들어 낸 합성어다. 절벽의 높이는 100미터, 그 한가운데에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언빌리버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하여야 한다. 간신히 기어들어 가듯 차가 갈 수 있는 한계지점까지 가서 해안 가 밭에서 밧줄을 타고 10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접근할 수 있다. 박수기정의 해안가 돌은 검은색 화산 암석이 아니다. 반들반들한 공룡알처럼 큼직한 공깃돌이 ‘기정’의 주상절리와 맞물려 신비한 외계(外界)를 자랑한다.

비 오는 늦은 오후 박수기정이 잘 보이는 카페를 찾아 탐색하여 들어갔지만, 호텔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다는 private 형 카페라 하여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선택을 제한하면 더 하고픈 마음이 든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다. 내 기필코 언제 다시 박수기정을 바라보면서 바닐라 라테를 한잔하리다.

*사진은 마라도와 박수기정의 풍경 (202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