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말로 거기에 있었구나
2022.10.18.
글쎄다. 어디를 가면 그 지방의 상징적 존재물이 있다.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과 자금성을 들려야 하고, 경주에 가면 진평왕릉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봐야 하고, 교토에 가면 청수사와 금각사를 들려야 한다. 그런 것처럼 삼척에 가면 죽서루(竹西樓)와 준경묘(濬慶墓)에 올라야 한다.
세종은 즉위 25년에 한글 창제 이후 2년 만에 첫 작품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다. 한글의 쓰임새가 과연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시의 형식이 되는지와 시경(詩經)처럼 노래 가사로 쓰임새가 있는지를 검증하게 된다.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天福(천복)이시니, 古聖(고성)이 同符(동부) 하시니.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뮐세 곶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바라매 아니그츨세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여기서 해동 육룡은 세종을 기점으로 아버지인 태종, 할아버지인 태조, 증조인 환조, 고조인 도조, 현조인 익조, 6대인 목조를 말한다.
준경묘는 바로 6대조인 목조의 아버지 이양무 장군을 말하는데, 아들인 목조가 전주지방의 수령과 불화로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추종 세력 170호를 데리고 삼척으로 이주한다. 목조는 아버지가 죽자 하늘의 계시를 받고 이곳에 선친의 묘를 쓰고 드디어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이것이 삼척 준경묘의 사적 기록이다.
내가 준경묘를 찾는 이유는 단 하나 소나무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흰 옷만큼이나 소나무를 사랑하였지만 내게 있어 소나무의 추억은 득실거리는 송충이뿐이다.
“십 리 산길을 한 시간 반 걸어 다닌 중학교 시절,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산에 있는 초목이라곤 바위틈새 땔감으로도 쓸모가 없는 진달래 나무 군락지였다. 어쩌다 마주한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득실거려, 어린 마음에도 그 가여운 소나무를 위해 발로 차면, 밤송이 떨어지듯 쏟아지는 송충이를 발로 짓이겨 복수 한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다.”
그런 유년의 추억을 몽땅 날려 버린 것이 준경묘의 금강송 군락이다. 파란 하늘에 붉은 비늘로 뒤덮인 미끈한 금강송을 보노라면 이 소나무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고는 참으로 무정한 사람이 된다.(페북 글 ‘세렌디피티, 삼척 준경묘 금강송’ 2020.9.27.) 미리 갖고 간 막걸리 한잔으로 여태까지 비바람과 천둥 번개, 화전민의 불과 벌목을 용케 피해 아무 탈 없이 자라온 그대를 위해 한 잔은 붓고 한 잔은 마신다.
이제 차는 V자 협곡을 빠져나와 북평(北坪) 장터로 간다. 어린 시절 시골 장터의 압권은 단연 ‘약장수’였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여~ 애들은 저리 가! 이 배암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리산 산삼을 먹고 자란 것이여~” 퍼포먼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어르고 달래는 솜씨는 가히 천하제일이다. 약 성분은 알 수가 없었고 더구나 약효는 미지수였지만, 얼마나 실감 나게 바람을 잡는지 한두 번 속고 나서야 그만둔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많던 약장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약장수가 사라지니 시끌벅적하던 시골 장터가 고즈넉한 절간이 되었다. 시간이 멈춘 곳 북평장터. 그곳에는 철 지난 양철지붕과 그 옛날 국밥집이 즐비하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순대국밥에 깍두기 김치와 새우젓을 듬뿍 넣어 먹는다.
내 비 오는 날 새벽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평장터로 와 양철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춰 막걸리 한잔하리라. 또한 흰 눈이 펑펑 내려 내 눈 앞을 가린 날 준경묘에 올라 눈 무게로 금강송 생 가지가 뚝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나무를 부둥켜안으리라.
우리 일행은 연암당(燕巖黨)과 피서산장(避暑山莊)팀을 합하여 ‘쉰연암당’으로 바꾸기로 하면서 여행을 마무리했다. 쉰은 쉰(50), 쉰(음식이 상하다), 신(神), 신(新), 쉬다(休) 등 다중적 의미가 있으며, 담대한 비전으로 열하일기 3천 리 길을 답사하며 유럽 뒷골목 길 답사를 한 달간 떠난다. “신세는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쉰연암당의 모토(motto)다.
*참고 및 인용: 윤일원 지음 <부자는 사회주의를 꿈꾼다>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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