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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뭐, 이건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뭐, 이건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2022.12.25.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줄은 알아? 크리스마스가 왜 이렇게 조용해? 예전에는 길거리가 흥청망청했고, 덩달아 내 청춘도 흥청망청했지. 그 들뜬 기분, 너무 좋았어. 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어. ‘나 때는 말이야~’ 하면 꼰대라고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때는 말이야~, 방송에 온통 성탄절 영화로 쫙 깔리고, <밴허> 오호, 그 잘생긴 조각 배우 찰턴 헤스턴이 쌍두마차를 타고 짠~ 하고 나타나면 그 감동, 이제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된 거야. 그리고 밤 10시 정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떡 하니 TV에 등장하지. 모두 연탄불의 온기가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아랫목에 옹기종기 앉아 청순한 비비언 리와 느끼한 클라크 게이블의 성우 목소리를 듣지, 정말 죽여줘~ 그 기분 알아. 온통 “미국은 저랬구나~”, 우리는 언제 저래,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한없이 부러워했지. 그러면 어른들은 쓱 나가 밤새도록 술 마시다가 이른 새벽에 들어와.

언제나 바람을 먼저 잡은 쪽은 방송국이었지. 그러면 시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을 하지. 뭐라도 해야 될 듯한 기분, 역시 불을 지르는 것은 청춘이야. 서울 종로로 쏟아져 나왔지. 뭐 약속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집에 있으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피맛골을 서성이다 와야 직성이 풀렸거든. 나때는 크리스마스날 마신 술이 연말까지 갔어. 알아? 진짜야. 잠시 시골에 있을 때의 그 쓸쓸함을 알아? 누구라도 올 것 같아 띄엄띄엄 오는 버스를 먼발치에서 지켜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어. 메시지는 단순해. 도시로 와라, 뭐 이런 거였지.

또 길거리는 어땠고, 가게마다 캐럴을 틀어 시끌벅적했지. 음반 가게만 트는 것은 아니야. 옷 가게도 틀고, 식당도 틀고, 다방도 틀고. 다 틀어 그냥 틀어. 새벽닭 울음 같아서. 한 놈이 울면 다 따라 울잖아.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 CD라도 한 장 사자. 가수도 캐럴을 부르고, 연예인도 캐럴을 부르고, 코미디언도 캐럴을 부르고 했어. 근데 꼭 귀여운 꼬맹이가 등장해서 듀엣으로 부르지. 그러면 성탄절 분위가 팍팍 더 나.

오~, 이 유혹.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이 유혹. 하얀 생크림이 잔뜩 올려져 있는 케이크. 절대 놓칠 수 없지. 결혼이라도 해 봐. 100% 의무감에 사야 하고, 데이트하는 연인이라도 있다면 또 100% 커팅을 해야지. 이것 놓쳤다면 1년 동안 시달릴 일을 생각하면 끔찍했어. 그랬어! 그랬단 말이야. 왜냐고, 몰라. 그냥 달달한 그 무엇이 먹고 싶었나 봐. 그래야 하는 분위기였거든.

아직도 크리스마스 이야기 반도 못 한 거 알아. 선물이지. 세상에나~ 선물만큼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을까? 이 나이가 되어도 늘 선물에는 신경이 쓰여. 왜, 한 번도 선물할 분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온통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그러다가 이맘때가 되면 생각이 나는 거야. 뭘 어째겠어. 양발이랑, 속 내의, 장갑을 사곤 했지. 또 애들 선물은 또 어떻고, 자고 일어나면 산타가 준 것처럼 꾸미느라 절절맸지.

이제 마지막이야, 성탄절 카드. 그때는 직접 만들어서 보냈다. 학교에서도 만들고 교회에서도 만들고, 그래서 자기만의 카드에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써서 보냈지. 그냥 우표가 아니야. 성탄절 그림이 들어간 우표를 사서 보냈지. 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친구에게도 일일이 보냈어. 그랬어, 진짜로? 그러면 연말 분위기와 새해 분위기가 싹 스며들지.

이제,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는 사라지고 없어. 너무 쓸쓸해. 방송국은 죄다 살벌한 정치 이야기로 도배를 하고, 케이블TV는 권력의 야사를 찾느라 정신이 없고, 유튜번가 뭔가 하는 친구는 자극적 이야기를 찾느라 거대한 음모론을 꾸미는데 정신이 없고.

나는 또 어때. 이른 아침부터 인왕산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올해는 신경을 좀 쓰느라 1시간 동안 끙끙 파워포인트 작업을 해서, 카드에 들어갈 글이 생각나지 않으면 검색만 하면 쫙 나오고, 그중에 하나 골라 쓰면 되고, 그것도 싫으면 남들이 보내 준 것 중 하나를 골라, 10분 안에 카톡으로 쫙 보냈지. 그러면 저쪽에서 답장이 와. 아마 나와 비슷한 방식을 썼을 거야. 아참, 선물. 잊고 있었네. 선물은 없어. 안 한 지 오래돼

왜 이럴까? 배고플 때는 상상만으로 행복했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야. 달달한 케이크도 먹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여행도 가야하고, 차도 있어야 하고, 내 집도 있어야 하고…, 이제 이런 일은 일상이 된 거야. 

그렇지만, 배부를 때는 충족된 욕망 넘어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아야 해. 찾기가 너무 힘들어. 어쩌면 내 생각인데, 일반인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 인간 본성에 매우 가까운 욕망, 권력욕이야.  집에서도, 삼실에서도, 그 만만한 동창 모임에도 권력을 사용 못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하면 끝이야. 하지만 마지막 남은 곳 정치판이야. 

이 권력욕의 대리만족을 위해 오늘도 살벌한 정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거대한 음모론의 진원지를 찾아 기웃거려야 하고, 점쟁이만도 못하는 유튜버의 정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어설픈 케이블TV 정치 평론가의 추측에 솔깃해야 하고, 그런 다음 카톡으로 쫙 퍼 날라야 해. 뭐, 이건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할 수 없어. 그래야만 하니까.

*사진은 크리스마스 카드(2022.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