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다들 행복하였는지요?
2022.12.26.
어떤 사람이 묻더군. “행복하게 잘 살아?” “글쎄” 이미 이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응, 잘 살아, 행복해” 누가 스스로 불행을 달고 다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행복이 파랑새처럼 순식간에 지리산 천왕봉이나, 한라산 백록담만큼 달아나는 데 있다.
제 페북의 글과 사진을 조그만 관심 있게 봐주신 분은 모두 알 거다. “날이면 날마다 인왕산이 훤히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라는 의미를. 세상에는 늘 양면성이 있다. 서울에서 공기가 좋다는 뜻은 높이가 있다는 뜻이고 높이는 곧 아파트 가격을 결정하는 것. 즉 역세권에서 점점 멀어짐을 뜻하는 이 단어를 모를 만큼 바보는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실이 불편했다. “어디에 사냐?” 하고 물으면 그냥 “아파트에 살아”라고만 답한다. 그런데, 이젠 정말 말끔히 그런 불편함이 사라졌다. 정말로! 당당하게 페북에 올리기도 하는데 가족들이 제발 사생활 공개는 “너무 없어 보이니 하지 말라” 해서 자기검열 과정에서 지워버렸다.
정말 자본주의 시대에 욕심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절대로. 나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근기를 타고 태어나지 못했고, 그렇게 정진하지도 못했다. 다만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지난주 영흥도에서 ‘일삼오’ 모임이 있어 들어갔다. 거기서 “3년 안에 뼈 빠지게 1억 모아 세계 일주 떠나자. 돈 떨어지면 다시 들어오자.” 이렇게 약속했다.
시골에서 흔히 말하는 물길을 돌린 것이다. 물길을 돌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곳에 대못을 여러 개 박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물길을 돌릴 수 없다. 책 몇 권 읽고, 스님한테 법문 몇 번 듣고, 목사님한테 설교 몇 번 들었다고 물길이 바뀌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매우 주관적이다. 서양에서는 ‘subjective wellbing’ 이라 부르고 우리말로는 ‘자기 주관적 만족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옛 어른들은 수분지족(守分知足), 안분지족(安分知足) 같은 말로 표현하기를 더 좋아했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핏줄이 대부분을 결정하는 신분 질서가 엄격한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기 수양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정부분 타당한 가치는 있다. 나이가 들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멈추는 것이 해답이다.
그리고 물길을 돌려야 한다. 물길이 터지지 않도록 대못을 여러 번 박아 튼튼하게 둑을 쌓은 다음 바로 그 순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를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 순례길로 뛰어든다면, 곧 ‘stock’이 아니라 ‘flow’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도구는 묶여 있는 돈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돈이라는 사실을. 작은 연못이 저수지가 되고, 저수지가 호수가 되었다고 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흐르는 물의 양만큼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풍성한데.
언젠가는 아무리 허접한 인생을 살아도 시간과 돈이 있어 놀 때가 온다. 그때 우물쭈물 이것을 해도 재미가 없고 저것을 해도 지겹다면, 자기의 고유빛깔, true color를 찾지 못해서다. 오호라, 결코 내 마음 밖에 있는 그 어떤 외물(外物)로도 나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떠나라. true color를 찾아서, 그만큼 행복해질 것이다.
*올 한해 기억에 남는 사진 몇 장(2022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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