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렌디피티

지식인으로 생존하려면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이 있어야.

 

[삼선 이야기] 지식인으로 생존하려면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이 있어야.

2023.1.20.

조선 정조 때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의 <소회(所懷)>에 나오는 글이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망하겠지만, 조선은 ‘검소함’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역설이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베틀이 없고, 그렇다 보니 비단 짜는 여인의 기술이 사라졌습니다. 음악을 숭상하지 않으니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이 조화롭지 않습니다. 물이 새는 배를 타고, 씻기지 않은 말을 타며, 찌그러진 그릇에 밥을 먹고, 도배가 안 된 방에 거처하기에 공업과 목축과 도자의 기술이 끊어졌습니다.”

오호라, 정조 때 지식인은 온통 부국강병을 위해 강한 개혁 의지를 표명한다. 박제가는 <북학의>를 지어 임금에게 올리면서 “양반을 도태시켜라, 그리고 수레를 통용해라.” 이것만으로도 부국강병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동주, 그는 1917년 만주 동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 1945년 일본 후쿠오카(福岡) 교도소에서 27세 나이로 요절한다. 그의 시 <별 헤는 밤> 일부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는 만주벌판에서 태어나 일제의 탄압이 절정을 치달을 때 태어나고 죽었다. 그런 그는 시대 상황과 매우 다르게 아주 서정적 시를 남겨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메타포가 강하다. 부드러움 안에 강함을 숨겼다.

반면에 이육사는 1904년에 안동 도산면 원촌리에 태어나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40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시 <광야(曠野)> 일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는 40년 짧은 생애에 17차례나 투옥을 거듭하면서 저항의 강도를 높혀갔다. 그의 시는 만주벌판처럼 거칠고 투박하며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강인한 이미지를 준다. 그의 메타포는 강함에 강함을 더하는 구조를 선택했다.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안다. 만주 벌판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거칠고 강함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감성을 남겼고, 안동 낙동강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말랑말랑이 아니라 거칠기 그지없는 시어를 남겼다. 

왜 그랬을까? 지식인의 모습이다. 지식인은 천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변하되 변치 말아야 할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박제가가 정조시절 제도의 억압에 갇힌 시대 정신을 노래했다면, 이육사와 윤동주는 나라 잃은 서러움을 시어속에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고 하면서 변치 말아야 할 그 무엇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찾는다.

안동KTX역에서 만난 우리는 1호차와 2호차를 나누어 타고 안동 시내를 빠져나와 굽이굽이 2차선 도로를 달린다. 분지형 야트막한 산을 지나면서 간간이 안동호수를 바라본다. 안동 시내에서 온혜리로 들어갈 때 만나는 풍경이다.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없는 도농(都農)의 풍경이다. “이런 곳에 저런 인물이 나왔을 만무한데” 하고 회의감이 들 무렵 차는 다시 점점 야트막한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산이 강을 건널 수 없는 숙명이 될 때 즈음 도착하는 곳이 이육사 문학관이다.

이육사 문학관에 11:30에 도착하니 “육사 이원록 선생 순국 79주기 추념식” 행사가 열리며, 그저 그런 축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가 <꽃>이라는 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나는 작은 선물이지만 내 책 <부자는 사회주의를 꿈꾼다>을 이옥비여사에게 드린다.

강하다. 낙동강이 협곡을 만나면서 만들어진 거침이 시어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꽃 맹아리가 터지고 봄이 오면 제비 떼가 까맣게 날아오기를 기대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고백한다.

나는 지식인이라면, 종손이 받들어 모시면서 가문에서만 살아남은 불천위(不遷位)* 지식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식인이 되려면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은 물론 변치 말아야 그 무엇마저 있어야 한다.

이육사는 그랬다. 일제 식민지 시절, 유혹이 많았을 지식인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올곧게 한평생 살다가 순국했다. 흔치 않은 드문 자화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니 서울서 온 여행객이 이육사 순국 기념식에 떡 하니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육개장과 보리떡, 식혜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1, 2호차는 다시 농암고택으로 달린다. 빤히 보이는 거리지만, 길은 강을 건널 수 없고, 길은 산을 넘을 수 없어서 굽이굽이 골을 따라 달린다. 차는 저만치 청량산 아래까지 달렸다가 다시 거무튀튀한 바위층이 떡 시루처럼 층층이 쌓인 한 가운데에 나 있는 강을 따라 내려가니 고택이 창연하게 들어서 있다.

내 고택을 답사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곳으로 전화를 했더니만,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하고 가라 한다. 그것을 양 선생님이 종손께 전화를 드려 함께 기념 촬영하고, 종손에게 농암 어른 자랑 좀 해달라고 했더니, “지손(支孫)은 자랑질 할 수 있어도, 주손(胄孫)은 하면 안 된다.”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간단한 기념 촬영과 제 책 <맹문깨천>을 드리고 긍구당(肯構堂) 고택에 나란히 앉아 강을 바라 보고, 강을 따라 걷기고 하고,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마냥 여행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농암 이현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천자문 <제91구> ‘兩疏見機(양소견기), 解組誰逼(해조수핍)’의 주인공이다. 두 소씨인 소광(疏廣)과 소수(疏受)는 벼슬이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할 때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러자 황제와 태자가 황금 70근을 내려준다. 그러면서 고향에 내려와 친지와 친구를 불러 날마다 잔치를 베푸니, 지인이 한마디 하면서 “그 많은 황금을 술과 노래로 탕진할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느냐?” 하니 “자식이 재능이 없는데도 재산이 많으면 허물이 많고, 자식이 재능이 많은데 재산도 많으면 뜻을 펼치기 어렵다.”라고 딱 잘라 거절한다.

농암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중종 임금은 금서대(金犀帶)를 하사하고, 그는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어 자적(自適, 무엇에 속박됨이 없이 즐기는 것)의 말년을 보낸다. 또한 46세 때 농암 기슭에 애일당(愛日堂)을 짓고 이곳에서 명절 때마다 때때옷 차림으로 춤을 춰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는 고사는 너무나 유명하다. 애일당은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아껴(愛日) 어버이께 효도하겠다”는 뜻이다.

*불천위(不遷位)는 조선시대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학자에게는 영원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을 말한다. 아무리 조상이 위대하다고 생각해도 후손은 반드시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폐해야만 했다.

*3부로 이어짐 (도산서원, 겸암정사, 하회마을)

*사진은 이육사 기념관과 농암종택(202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