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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꽃이 피었으니 열매가 많이 열리겠구나

 

꽃이 피었으니 열매가 많이 열리겠구나

2022.9.19.

아버지는 남자다. 여자인 어머니한테 태어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딸이 자라 여인으로 성숙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려 한다. 딸이 자라는 내내 남자인 아버지는 모두 처음 마주한 낯선 경험이다. 가냘프고 여린 꽃이자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깨질세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온 나날이다. 그런 딸이 시집을 간다.
 
조선 정조 때 실학자 박제가(朴齊家, 1750~1805년)는 딸이 태어나서 형제들과 오순도순 지내다가 부모가 정해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죽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낸다. 

1790년 겨울, 딸이 15살이 되자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윤씨 집안의 아들 후진(厚鎭)에게 시집보낸다. 혼인 당일 정조 대왕은 비단과 솜을 보낸다. 정조는 박제가가 청 건륭제의 팔순 잔치 사절단으로 5개월 만에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북경으로 갈 것을 명하니 미안한 마음에서다. 혼인 이틀 전이었다.

박제가의 딸은 시집 간 지 2년 만에 친정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곧이어 1년 만에 시어머님 상(喪)을 치르느라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다. 박제가는 단옷(端午, 음력 5월 5일)날 관아에 홀로 앉았는데 급보가 날아들어 한밤중에 두 어린 아우를 태우고 비를 맞으며 80리 길을 달려가다가 말 위에서 부음을 듣고 들판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때 겨우 23살이었다.

1813년 초가을,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13년째에 접어들었다. 유배를 떠날 때 6살이었던 외동딸이 이제 시집을 가려 한다. 강진으로 내려온 이후 아들은 드문드문 내려왔지만 여태 한 번도 본적도 잊은 적도 없는 딸이었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지만 다 천연두로 죽고 2남 1녀만 살아남았다. 3년 전(1810년)에 부인 홍씨가 병이 몹시 들자 시집올 때 갖고 온 빛바래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강진으로 보낸다. 

다산은 치맛감을 잘라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적어 하피첩(霞帔帖, 붉은색이 노을처럼 바랬다는 뜻)이라 이름을 짓고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 것이고, 두 어버이의 아름다운 은택이 가슴 뭉클하게 일 것이다.”라면서 아들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남은 천 조각을 보관하고 있다가 딸에게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를 그리고 시와 글을 남겨 전해준다.

사뿐사뿐 나는 새 우리 집 매화 가지에 앉아 쉬네
꽃향기 짙어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여기 머무르다가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꽃이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구나

翩翩飛鳥(편편비조) 息我庭梅(식아정매)
有烈其芳(유열기방) 惠然其來(혜연기래)
爰止爰棲(원지원서) 樂爾家室(낙이가실)
華之旣榮(화지기영) 有賁其實(유분기실)

이 시는 『시경(詩經)』 <아가위 꽃>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 주어라”에서 따왔다. 역시 거유(巨儒)답다. 우리는 윤씨 집안으로 시집간 다산 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모른다. 그때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형과 매부가 죽고 폐족(廢族, 과거 시험을 볼 수 없는 집안)이 되어 험난한 길을 걷고 있었던 때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 계열 중농 실학자를 제거할 때였다.

*참고 문헌 : 손태호 지음 <나를 세우는 옛 그림> 2012년 아트북스 출판, 정민 지음 <한시 이야기> 2002년 보림 출판, 그림은 정약용이 딸에게 그려준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