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해국(海菊)을 닮았구려
2022.10.16.
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노래는 그 시점의 그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구절초 만발한 가을이 되니 양현경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듣고 싶다.
동해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니 차가 한강 위를 미끄러지듯이 스쳐 지나가고 갤럭시 버즈 아이에서는 양현경의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물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삭신이 시큰거리고 애간장이 녹는다.
“음악의 소리는 모발(毛髮)의 숲 사이를 감돌고 혈맥의 살결을 통과해서 들려 올 때는 가물가물 쫓아갈 수 없을 듯합니다. 만져도 손에 걸리는 게 없고, 보아도 눈에 뜨이는 게 없습니다만, 사람의 삭신을 시큰거리고 슬프게 만들며 애간장을 녹입니다. 떠나갈 듯 가다가, 다시 돌아오는 소리는 마치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고, 끊어지다가 이어지는 소리는 마치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망양록(亡羊錄)》에 나온 이야기로 중국 선비인 왕 민호와 윤 가진 과 나눈 필담 속 글이다.
연암당(燕巖黨)과 피서산장(避暑山莊) 팀이 강원도 동해시에서 가을 워크숍을 갖는다. 올봄 5월 16~17일 여수 & 순천만 트레킹 (‘삶이란 지음(知音)을 알아가는 과정’ 페북 5.17일 이후 3부작 참조) 이후 근 5개월 만에 해파랑길 33번 코스와 묵호등대, 그리고 삼척 준경묘와 북평장터로 떠난다.
서울 한양 땅에서 나와 이상랑 작가, 홍붕선 단장이 고속버스와 KTX로 오고, 강원도 원주에서 이명훈 작가가 고속버스로 오고, 대구에서 피사 산장 팀이 포항을 거쳐 7번 국도를 따라 올라온다.
13:30, 해파랑길 33번 코스 감추사(甘湫寺) 들머리로 가니 벌써 이상이랑 작가와 홍붕선 단장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못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데 이 작가와 편집장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춘다. 철길 육교를 건너면 바로 해송 사이로 해파랑길이 한섬 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짙푸른 바다와 옅은 하늘 사이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길이 보인다. 들머리를 따라 이어진 철둑에 해국(海菊)이 간간이 보인다. 내가 처음 해국을 본 것은 울산 대왕암 절벽 틈새였다. 가을꽃인 해국과 구절초, 개미취, 쑥부쟁이, 해국은 딱 보면 알지만, 나머지는 언제나 헷갈린다. 나는 자칭 천석고황이 되어 전국을 쏘다녀 이들 꽃을 너무나 많이 봤고 수없이 촬영했지만, 오늘까지도 이유미의 『한국의 야생화』를 펼쳐놓고 쑥부쟁이와 구절초, 개미취를 구별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여전히 책만 덮으면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린다.
안도현 시인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라고 ‘무식한 놈’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밝혔지만, 나도 이제는 무식한 놈으로 그냥 살련다. 그냥 해국과 나머지, 이 둘만 구별하련다.
무엇이 무엇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정체성과 이름이 딱 맞아야 한다. 왜 서로 비슷비슷한 들국화이면서도 하나는 쑥부쟁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구절초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개미취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름에 대한 정체성이 사라지니 꽃을 외워서 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해국은 딱 봐도 안다. 메마른 해안가 절벽 위에 위태롭게 무리 지어 핀 연보랏빛 꽃,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을 견디기 위해 보송한 털로 두툼하게 변해버린 잎새, 한 뼘도 되지 않은 나지막한 키로 강인한 꽃이며 토종이다. 해국은 울릉도와 독도, 동해안 절벽에 잘 자라며 꽃말은 그리움이다.
해파랑길은 짧은 해변을 뒤로 하고 한섬 절벽 위 해송 사이로 접어든다.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곧 몽돌해변이 나온다. 온통 누런 갈색 바위틈에 하얀 몽돌이 소복이 쌓여 있으니, 연암당과 피서산장 팀이 그냥 스쳐 지나갈 사람이 아니다. 파도에 돌돌 굴러가는 자갈 소리를 들으면 ‘삭신이 시큰거리고 애간장이 녹는’ 소리가 아니라,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같기도, ‘사랑하는 여인이 소곤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나는 무덤덤하게 3층 돌탑을 쌓는다. 그 어디에도 ‘축적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는 굳센 사나이의 결기 때문이니라.
길은 한섬 방파제와 자그마한 천곡항, 고불개 해변을 지나 철길 절벽으로 이어지고 이제 묵호항 등대가 빤히 보인다. 피서산장 박 대표가 “이때 기차가 와주어야 하는데”하고 푸념하니,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면서 달려온다. 언빌리버블!
이제 해파랑길은 바닷길을 접고 시내로 들어선다. 70년대 성장기의 세트장 같은 나지막한 단층 벽돌집이 이어지고, 대문만 열면 바로 찻길로 이어지는 구조가 낯설지만, 그 옛날 차가 없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차도가 아니라 골목길이었으리라. 묵호역을 지나 어슬렁어슬렁 묵호항할어회센터로 들어가니, 여전히 삶의 현장, 생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라 논골담길이다.
16:50 나와 박 대표는 차를 회수하려고 감추사 주차장으로 다시 가고 나머지 일행을 논골담길을 따라 묵호등대로 오른다.
(계속) 2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참고문헌 :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2> p.35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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