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과거 이념이 지배하는 곳은 안동 양반이 아니야
2023.1.21.
중국에서 전기차 만드는 공장에 근무하는 고등학생 동창생한테서 카톡이 날아왔다. 현지에 있을 때는 카톡과 페북이 차단되어 간간이 연결되었는데, 지난달 국내에 귀국해서 한 달 정도 있다가 2월 초에 다시 출국한다고 한다.
부산에서 안동으로 오기로 했다. 그냥 점심 먹고 카페에 노닥거리기보다는 같이 드라이브하고 걷는 것이 좋을 듯하여 길안면 묵계 만휴정(晩休亭)을 답사했다.
우선, 차를 주차하니 입간판에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라고 온통 광고판 같은 안내문이 잔뜩 걸려있다. 굽이진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계곡을 잇는 외나무다리 건너에 만휴정이 떡 하니 있고, 주렴에 ‘오가무보물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이라고 쓰여 있으면, 너른 암반 위에도 똑같은 글자가 각자(刻字)되어 있다. 해석을 하면,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는데, 있다면 오직 청렴결백뿐이다.”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5년 동안 생활하여 한자 해석에 제법 익숙한 동창이 대뜸 “조선시대 선비들이 아무리 청백(淸白)을 추구하고, 충효가 삶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자동차를 만들고 냉장고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라고 하니, 나도 대꾸하기를 “충효(忠孝)와 정덕(正德), 청렴과 겸손은 가난한 나라의 사대부가 할 말이 아니라 부자 나라의 사대부가 해야 될 말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네 생각이 남들과 매우 다르다.”라고 칭찬 겸 힐난조의 말을 한다.
어쩌면 안동 여행의 해답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여전히 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 법고창신(法古創新), 과거의 지식이 펄펄 살아 현대에 접목하지 않으면 그것은 박물관의 죽은 지식이 된다. 화석 속에 꽁꽁 갇혀 먼지 폴폴 풍기는 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프로토콜이 연결되어야 한다. 지금의 언어로 그들을 다가갈 때, 지금의 생각으로 그들을 접목 시킬 때 그들이 되살아난다. 곰팡내 나는 글을 되살리고 죽이는 일도 우리의 몫이 된 셈이다.
안동 양반이 평생을 가꾸고 지키고 닦았던 그 책들, 나는 박사 과정을 취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정규과목으로 이수하지 않았다. 이 말의 함의는 “이것이 없어도 지금의 국부를 창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내가 북콘서트 패널들과 함께 안동 여행을 기획했을까? 잘살기 때문이다. 잘 사니 많은 문제가 쏟아진다. 국가 발전 경로를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공부를 거꾸로 했다. 먼저 이용후생 학문인 과학과 공학을 하여, 우선 나라의 백성을 잘살게 만든 다음에 지독히 심성을 파는 것이 옳았다.
이제 잘사니 퇴계가 보이고 농암이 보이며 그들이 가꾸어 놓은 꽃밭에 들어갈 수 있다. 안동에서 퇴계를 빼고는 그 아무것도 되지 않는 그 무엇도 되지 못하는 존재다. 모든 학맥은 퇴계로 귀결된다. 그만큼 존재 가치가 뚜렷하다. 퇴계의 두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두 가문이 벌인 400년 대결도 누가 퇴계의 정신적 맥을 이었느냐를 두고 다툰 보기가 드문 아름다운 갈등이었다.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두 서원 모두 간선도로에서 약 30분 걸어서 들어가야 제맛이지만, 차를 타고 창밖을 보면서 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길이다. 강을 따라 줄지어 선 늙은 노송과 굴참나무가 어울려진 길 끝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두 서원, 이제 우리의 애마는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고 살짝 걸어 굽이 틀면 만나는 서원에 당도한다. 400년 묵은 왕버들의 용트림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신비감에 마음이 움찔한다.
그리고 왕버들과 대각선으로 이어진 또 다른 나무 한 그루, 금송(金松)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금송을 기념식수로 심었다 하여 좌파들이 베어낼 것을 주장하자, 종손이 현재의 이곳에 다시 옮겨 심어 놓았다.
우리가 안동 여행을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충효와 정덕’ 마저 국가 발전 경로에 하찮은 일로 치부하고 난도질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도 실학이 움틀 230여 전에도 여전히 정덕만이 전부라 여겨 발끈했는데, 어찌하여 2003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일본 유학자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편찬한 ‘퇴계서초(退溪書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퇴계학은 일본 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무 한 그루조차 포용할 수 없는 한국 문화의 편협함을 일본 사람들이 안다면, “오호라, 그런 시대정신으로 계속 살아라. 그것이 조선이 근대화에 뒤쳐저 나라 잃은 아픔을 겪었는데, 또다시 이런 세력이 준동(蠢動)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이제 긴 여행의 마지막 종착점 숙소인 겸암정사(謙菴精舍)로 향할 차례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안동 간고등어 구이’로 저녁을 먹고, 별빛이 초롱초롱한 캄캄한 밤에 앞뒤 백미러 좌우 미러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겸암정사로 간다. 고맙게도 저녁은 우리의 세렌디피티 양돈영 선생님께서 내주셨다. 양반 집안의 2대 미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동네에서 거꾸로 우리가 대접받다니, 언빌리버블!
오늘따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방안에 온기가 없다. 주인어른께 군불을 더 때 달라고 조르니, “자고 일어나면 위풍으로 코가 꽉 막힐 거라” 면서 거절을 하니 같이 왔던 여성분이 “한쪽 코는 꽉 막히고 한쪽 코는 콧물이 줄줄 나와요” 하여 빵 터졌다.
내가 방을 예약하기 전에 주인 어른께 겸암 어른과 서애 대감 이야기를 부탁드렸더니만, 아주 매우 신이 나서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간간이 어려운 용어와 사투리를 통역하면서 아랫목 구들방에 앉아 소위 현지인 이야기를 들었다. 거제에서 살아온 이야기, 서애 종택 종손과 재종간이라는 사실, 고택 관리의 어려움, 몽당빗자루 등등 그리고 요강을 두 개 가져오면서 여성이 자는 방에는 방안에 남정네가 자는 방에는 마룻바닥에 두고 간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불과 몇십 년 전 우리의 생활이었는데, 방바닥은 따뜻하나 위풍이 세서 방안에는 전혀 온기가 없다. 아마 영도 근처에 머무는 방 안 온도로 나는 빵모자를 덮어쓰고 자고, 다른 두 분은 거의 코만 내놓고 잔다. 분명 혹한기 훈련 체험이다. 하늘에 있는 별을 모아다가 불을 피우면 덜 추울까?
자정을 넘자 여우 울음소리 같은 것이 멀리서 들리고 새벽 4시경에 부엉이가 계속 울어댄다. 분명히 부엉이 소리가 맞다. 간간이 깬 잠을 다시 부여잡으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앞마당에 나가 밤 하늘 삼태성 별자리를 보고 강 건너 하회마을 불빛을 바라보는 것이 더 편안했다. 언제나처럼 영원히 그랬던 것처럼 새벽이 밝아 오고 커피 한잔으로 언 얼굴을 녹이고, 간밤의 치열했던 추위와 잠의 전쟁을 마감한다.
* 4부 하회마을 병산서원 소산마을로 이어짐
*사진은 도산서원 정경(20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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