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안동 양반이 되살아난 이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기록 때문
2023.1.21.
안동 서부에 풍산이라는 너른 들이 있다. 이곳 사람은 여기를 ‘평야’라 부른다. 옛날 중학교 <농업> 교과서에 ‘풍산 무우’라는 품종이 소개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양반 동네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농토이기 때문이다.
안동시내 임청각의 주인공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문이 낙동강 나루터의 물류로 부를 축적하였다면, 하회마을의 풍산 류씨와 소산마을의 안동김씨는 모두 풍산이라는 너른 들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어제 우리가 묵었던 겸암정사는 류운룡(柳雲龍, 1539~1601년)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하회마을 양진당(養眞堂)이 그의 고택이며, 서애 류성룡 고택은 충효당(忠孝堂)이다. 류운룡은 하회 류씨의 본가 종손이 되며 류성룡(柳成龍, 1542~1607년)은 그의 친동생이다.
내 가설은 이렇다. “위대함을 위대함으로 만드는 것은 글이다.” 임진왜란의 명장은 이순신이요 명재상은 류성룡이 맞다. 왜 그런가? 이들 모두 위대한 가히 위대한 수식어를 붙어 마땅한 문집을 남겼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와 <징비록>이다.
우리 역사에서 외침이 약 800회에 이른 나라에서 유독 이 두 사람만 각인이 된 것은 그의 글 때문이다. <난중일기>는 정조대왕의 공로다. 정조 대왕은 규장각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할 것을 명령했고, <징비록>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숙종 때 통신사절단으로 일본에 간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에서 <징비록> 유출을 금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책이다.
하회마을 서쪽 절벽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 바라보면 분명 오메가(Ω) 모양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농암 종택 앞이나 도산서원 앞을 흐르던 강이 이곳에 이르면 너른 풍산들을 만들고 난 후덕한 기운이 다시 여세를 몰아 협곡을 빠져나오면서 오메가 모양의 기하학 흔적을 만들었다. 풍산 류씨 집성촌, 이곳에는 단 한 분 류성룡이 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직선거리 2.2km 떨어진 곳에 소산마을이 있다. 안동김씨의 본향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 병자호란 때 잠시 이곳으로 낙향하여 살았고, 주전파(主戰論)의 대표로서 여기서 심양까지 소가 모는 수레를 타고 끌려갔다.
잠깐, 안동김씨 세가(世家)를 소개하면, 선 안동김씨와 후 안동김씨가 있는데, 선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 넷째아들의 둘째인 숙승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장수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며 인조 때 김자점, 독립지사 김구 선생님이 이 집안 출신이다.
후 안동김씨는 고려 왕건 때 삼태사 중 하나인 김선평(金宣平)의 후예로 그의 9대손 되는 김삼근이 비안 현감에서 물러나면서 이곳 소산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니 그 후손을 비안공파라 한다.
비안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계권은 한성부 판관을, 둘째 계행은 대사성을 지냈다. 맏아들 김계권은 출세길로 나아가 다섯 아들 중 막내인 김영수가 영천 군수를 지냈고 영수의 아들 3형제 중 맏이 영과 둘째인 번이 모두 문과에 올라 이때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명문 토대를 쌓았는데, 특히 둘째 김번(金璠, 1479~1544년)의 후손들은 서울 장동의 청풍계(청운동)에 세거하게 된다. 김상헌은 김번의 증손(曾孫)이 되며 이들이 조선말 세도 정치를 한 안동김씨다.
김번의 직계후손 중에 문과급제자가 136명에 이르고, 대제학이 6명, 재상(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5명, 판서(判書) 40여 명, 왕비(王妃) 3명, 후궁(영빈 김씨) 1명, 부마도위 2명을 배출하였다.
내가 왜 이렇게 안동김씨의 족보를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그 후손의 영화를 소개할까? 바로 하회마을 류성룡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하회마을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략가로서 단 1명이지만, 안동김씨는 같은 벼슬인 정승을 한 사람만도 15명이나 된다.
그런데 지금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소산마을을 찾는 이는 드물다. 왜 그런가? 안동 양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때문이다. “자신의 재능을 누구를 위해서 사용하였는가?”로 후대의 냉엄한 심판을 받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을 당한 체 조용히 징비록 저술에 몰두한다.
여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인공이 또 한 분 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이다. 그는 1590년 3월 서인 황윤길과 함께 조선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났으나, 돌아온 뒤 답변이 완전히 달랐다.
서인 황윤길은 “반드시 일본이 침략한다.”고 하였지만 동인 김성일은 “그런 조짐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고 답한다. 지금 좌파와 우파만큼 치열하게 대립했던 동인과 서인, 두 사람의 답변은 그들의 정치 색깔만큼 달랐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방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고, 진주목사를 대행하여 1차 진주대첩에서 승리하여 왜군이 전라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낸다.
글쎄, 그것만으로는 학봉 종택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후손 파락호(破落戶) 김용환, 평생 난봉꾼에 노름판을 전전하면 신줏단지를 세 번이나 팔아먹은 그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장전술로 난봉꾼에 노름꾼이 되어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먹었으니, 그 집안이 안동 양반의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
글쎄, 나는 또 그것 만으로도 학봉이 임진왜란의 허위 보고 전부를 다 갈음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기록이다. 학봉 종택 운장각에 보관된 유물이 15,000점이며 이 중 50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한 가문에서 보관 중인 유물이 이 정도가 되니, 가히 종손의 눈물 어린 정성이 아니면 불가능 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임진왜란을 연구한다면, 문서와 유물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임진왜란 의병을 연구하면 학봉을 만나게 되고, 학봉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를 인용해야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분명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이 글의 힘이다. 그렇게 학봉은 다시 ‘학봉역사문화공원’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안동 여행을 마무리 하려한다. 임청각에서 석주 이상룡을 만나야 하고, 묵계로 가서 김계근의 만휴정을 봐야 하지만, 1박2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 안동 구시장에서 안동찜닭을 먹고, 학봉 종택에서 다과상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직도 헛제사밥도 있고 안동 국시도 있지만, 그것을 남겨둠으로서 긴 미련을 간직하고 싶다.
짧은 1박2일 동안 우리가 만났던 이육사 친혈육인 이옥비 여사님, 농암 종택 종손인 이성원님, 학봉 종택 종손인 김종길님, 하회 충효당 종손인 류창해님께 감사드린다.
*사진은 하회마을 충효당, 소산마을, 학봉 종택(202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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